브랜드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한정 생산되는 애스턴 마틴의 최신 모델 ‘발러’.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자동차의 모델 이름은 기억에 뚜렷하게 남을수록 좋다. 그런 이유로 자동차 기업들은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고민한다. 간단히 상징적 숫자를 쓰기도 하지만 브랜드가 구매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추상적 이미지를 고려해 여러 후보 가운데서 고르기도 한다. 몇몇 업체는 나름의 기준과 원칙을 세우고 이름을 정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알파벳 브이(V) 자로 시작하는 단어로 많은 모델에 이름을 지어온 애스턴 마틴이다.애스턴 마틴의 모델 이름에 처음 V로 시작하는 단어가 쓰였던 때는 1951년이다. 당시 애스턴 마틴이 만들고 있던 DB2에 고성능 모델이 추가됐는데 이를 일반 모델과 구분하도록 붙인 별칭이 밴티지였다. 밴티지는 당시 애스턴 마틴 직원이 제안한 것으로 ‘유리함’ 또는 ‘우월함’을 뜻한다.
1988년에는 비라지라는 이름이 첫선을 보였다. 1969년부터 애스턴 마틴의 대형 그랜드 투어링 모델 자리를 지켰던 DBS와 AM V8의 자리를 20여 년 만에 넘겨받은 새 모델의 이름이었다. 비라지는 당시 애스턴 마틴 회장이었던 빅터 건틀렛이 여러 제안 가운데 직접 선택한 것으로 프랑스어로 ‘커브’ ‘회전’ 등을 뜻하는 말이다.
그다음으로 역사가 오래된 이름으로는 볼란테를 꼽을 수 있다. 볼란테는 ‘비행하는’ ‘나는’ 등의 뜻이 있는 이탈리아어 단어로 애스턴 마틴이 1965년부터 1966년 사이에 만든 숏 섀시 볼란테에 처음 쓰였다. 이후 애스턴 마틴 컨버터블 모델에 볼란테라는 별칭을 붙는 것이 전통이 됐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로 V에 담긴 뜻은 더 용맹스러워졌다. 2001년에 스포츠카 라인업 최상위 모델 계보를 이어 새로 나온 뱅퀴시의 이름에는 ‘정복하다’ ‘무찌르다’ 등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강력한 성능과 박력 있는 스타일과 잘 어우러지는 뜻이기도 하지만 럭셔리 스포츠카 브랜드의 모델 이름으로 쓰기엔 경박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애스턴 마틴은 부정적 의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2012년에 나온 새 기함의 이름으로 다시 뱅퀴시를 선택했다.
애스턴 마틴 ‘브이(V)’ 모델의 시발점이 된 ‘DB2 밴티지’. 애스턴 마틴 제공
애스턴 마틴은 2000년대 후반 이후 소량만 한정 생산하는 특별 모델을 내놓기 시작했다. 특별 모델에 V자로 시작하는 이름이 붙은 첫 사례는 2015년에 선보여 24대만 생산된 트랙 전용 모델 벌컨이었다. 벌컨은 고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불과 대장장이의 신인 불카누스에서 비롯됐다.그리고 올해 7월 11일에는 애스턴 마틴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새로운 V 모델이 공개됐다. 새 모델의 이름은 발러로 전쟁터에서의 용기와 용맹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가져왔다. 발러는 애스턴 마틴이 거쳐온 110년 세월의 흔적들을 돌아볼 수 있는 디자인과 기술적 특징을 담고 있다. 앞서 선보인 빅터를 연상케 하는 외모는 1980년대의 V8 밴티지와 그 모델을 바탕으로 만든 르망 24시간 경주 출전차인 RHAM/1 등 애스턴 마틴이 만들었던 특별한 차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발러는 무엇보다도 내연기관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델로서 고성능 럭셔리 스포츠카의 상징적인 V12 엔진을 차체 앞쪽에 놓고 수동 변속기를 갖췄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는 최근 스포츠카의 기술적 흐름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지나간 스포츠카의 황금기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는 게 애스턴 마틴의 설명이다. 애스턴 마틴은 탄생 110주년을 기념한다는 의미를 담아 발러를 110대 한정 생산할 계획이다.
V 모델의 전통은 전기차 시대에도 이어질 듯하다. 애스턴 마틴은 V자로 시작하는 여러 이름을 상표로 미리 등록해 놓았다. 바레카이와 밸런에 이어 올해 초 뱅가드도 등록했다. 상표로 등록은 했지만 아직 쓰지 않았다. 앞으로 나올 모델은 전기차가 될 것이기에 어느 것이든 미래 전기차에 쓰일 것이 틀림없다. 애스턴 마틴은 2025년에 첫 전기 스포츠카를 내놓을 예정인데 과연 어떤 이름이 붙을지 궁금해진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