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품질의 상향 평준화로 디자인은 브랜드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내·외관 디자인이 트렌드를 반영하지 못하면, 제품 성능이 좋더라도 소비자의 외면을 받기 때문이다. 이에 각 제조사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가치를 다양한 라인업에 일관적이고 창의적으로 전달할 디자이너 영입에 필사적이다. 자동차 업계를 대표하는 뛰어난 디자이너들은 이같은 고민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을지 월간 연재 코너인 [자동차 디자人]을 통해 살펴본다.
독일 프리미엄 자동차 제조사 BMW는 2008년 ‘프로젝트 i’ 연구소를 설립, 브랜드 전동화와 지속 가능성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BMW 미래를 책임지는 중차대한 프로젝트를 담당한 연구소는 10여년간 수많은 콘셉트를 선보이며, 브랜드 헤리티지를 계승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어떻게 디자인할지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한 결과물을 BMW i 시리즈에 담아 선보이고 있다.
카이 랭어(Kai Langer)는 BMW i 디자인 총괄이다. 그는 미래를 위한 답을 내놓기 위해 모든 것을 개척하는 게 BMW i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기후 변화로 인한 규제부터 소비자의 요구사항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감지한 후 이를 극복할 혁신을 선보이는 방식이다. 카이 랭어는 BMW i 출범 초기부터 그의 동료들과 함께 시리즈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음악에 빠져 있던 유년시절…서적에서 접한 ‘자동차 스케치’에 매료
자동차 엔지니어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카이 랭어는 어린시절 집안의 대화주제가 언제나 자동차였다고 회상한다. 핫휠(HotWheels)과 매치박스(Matchbox)사의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며 자란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빠짐없이 참가할 정도로 자동차 마니아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동차 엔지니어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디자인보다는 기술적인 부분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펑크-메탈 밴드 트리거(Trigger)의 멤버이자 드러머로 음악을 만드는데 빠져 있었으므로, 취미 생활 역시 디자인과 거리가 멀었다. 독일 자동차 제조사인 오펠(Opel)의 기념서적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해당 서적으로 처음 자동차 스케치를 접한 카이 랭어는 스케치가 실제 자동차로 구현되는 모습에 매료됐다. 그 당시 받은 느낌을 마치 마법의 펜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 순간으로 회상했다.
카이 랭어는 음악 레이블 EMI 일렉트롤라(Electrola)에서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데 확신이 없었다. 이미 디자인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음악 레이블에서 활동하면서도 꾸준히 앨범 커버를 그린 이유이기도 하다. 디자인을 향한 그의 열정을 알아본 레이블 동료들은 그에게 독일 슈투트가르트 인근의 포르츠하임 대학에서 운송 디자인을 전공할 것을 추천한다. 카이 랭어의 진로가 결정되는 순간이다.
‘BMW Z4’에 반해 입사…세계 3대 거장 ‘크리스 뱅글’과 협업하며 성장
카이 랭어는 포르츠하임 대학에서 운송 디자인을 공부하는 동안 많은 실무 경험을 쌓았다. 혼다의 프로젝트를 맡은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혼다 S 2000의 페이스리프트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고, 폭스바겐 시로코(Scirocco)를 만들어 낸 폭스바겐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여러 제조사를 두루 경험하며 진로를 고심하던 그를 사로잡은 자동차 디자인이 있었다. 앤더스 워밍(Anders Warming)이 디자인한 로드스터, ‘BMW Z4’였다.
당시 파리 오토쇼에서 접한 Z4 디자인에 완전히 매료된 카이 랭어는 오직 BMW 입사만을 목표로 학업에 매진했다. BMW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활동할 수 있다면, 다른 분야는 기웃거리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그에게 간절한 목표였다고 한다.
2003년, 학수고대하던 BMW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딘 카이 랭어는 BMW 1 시리즈 컨버터블과 쿠페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BMW X1(E84)’과 1세대 ‘BMW X6’의 디자인에 참여했다. 특히 카이 랭어는 세계 3대 거장으로 꼽히는 크리스 뱅글(Chris Bangle) 전 BMW 총괄 디자이너와 함께한 ‘지나 라이트 비저너리(GINA Light Visionary)’ 프로젝트를 특별한 경험으로 꼽았다. 지나 라이트 비저너리는 기존의 틀을 깬 선행 디자인을 적용한 콘셉트 카다. 예컨대 자동차 외부 패널을 철과 알루미늄 등으로 무조건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방식이다. 해당 소재 대신 특수 섬유를 적용해 어떤 형태로든 완벽하게 변할 수 있는 초경량 콘셉트카로 선행 디자인을 실험하는 방식이다.
카이 랭어는 크리스 뱅글과 함께 지나 라이트 비저너리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많은 연구와 혁신적 요소들로 과감한 시도를 했다. 덕분에 당시만 해도 BMW X1이나 X6와 같은 차량이 없었지만, 주저 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같은 실험정신을 살려 탄생한 것이 ‘프로젝트 i’다. 카이 랭어는 선행 디자인 팀에서 처음 팀 리더를 맡게 된 이후 BMW i3 디자인을 주도했으며, 2~3년간 BMW 4 시리즈 프로젝트 매니저 직책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수 성과를 창출한 카이 랭어는 BMW 디자인 총괄인 도마고 듀케(Domagoj Dukec)에 의해 BMW i 디자인 총괄로 임명된다.
BMW i 디자인 총괄로서 본격적으로 브랜드 미래 방향성을 그리기 시작한 카이 랭어는 ‘BMW iX’, ‘BMW i4’, 콘셉트 카인 ‘BMW i 비전 서큘러’, ‘BMW i 비전 디’, ‘BMW 비전 노이어 클라쎄’의 탄생을 주도한다.
전동화 전환…"새로운 부품과 모듈 재배치 고민할 좋은 기회"
내연기관에서 전기차 전환이 이뤄지는 지금, 자동차 디자이너인 카이 랭어 또한 급격한 변화를 경험 중이다. 내연기관에 있던 것들이 전기차에는 없어지면서, 예컨대 변속기가 있던 자리를 대신할 디자인적 요소들을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그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카이 랭어는 이같은 변화를 새로운 부품과 모듈의 재배치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한다. 전기차로의 전환은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더 넓은 실내 공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공간 활용에 대해 다시 생각할 계기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고민의 결과물을 BMW의 상징적인 더블 헤드라이트를 일루미네이트 키드니 그릴에 통합한 BMW 비전 노이어 클라쎄 전면에 담았다.
헤드라이트와 키드니 그릴을 통합한 이 기능을 BMW는 ‘피지털 아이콘(Phygital Icon, 피지컬과 디지털의 융합)’이라고 부른다. 카이 랭어는 미래차 시대에 효율성이나 공기 역학과 같은 주제는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시 말해 전기차로의 전환으로 디자인의 복잡성은 감소하고 통합이 이뤄질 것이라 내다본 것으로, 2025년 이후 출시될 노이어 클라쎄에 그 트렌드를 담았다고 강조했다.
카이 랭어는 iX에 적용한 샤이 테크(Shy Tech) 기술도 미래 변화상 중 하나의 예라고 언급했다. 샤이 테크는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물리 버튼이나 오디오가 소비자가 필요로 할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식의 감춰진 기술을 뜻한다. 카이 랭어는 디자인의 복잡성을 배제하고 통합을 강조하기 위해 스피커를 온 사방에 설치하지 않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오디오, 즉 샤이 테크를 디자인에 반영했다.
카이 랭어는 전동화를 추진하면서도 사람을 향한 방향성을 유지하는 데도 중점을 둔다. 예컨대 그는 iX 실내에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플로팅 스크린을 적용했다. 기존 대시보드 디자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카이 랭어는 iX가 고성능 스포츠카, 즉 일부 마니아의 전유물이 아닌 가족과 함께 하는 장거리 운전에 적합한 차라고 여겼다. 따라서 운전자와 탑승자가 목적지에 도착해도 차에서 내리기 싫을 정도로 편안하고 안락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그는 부티크 호텔이나 멋들어진 인테리어를 지닌 거실의 디자인을 떠올리며 iX 실내를 꾸렸다. 자동차라기보다는, 가구에 가까운 실내 구조와 배치를 선택했다. 그 결과 센터 콘솔은 사이드 데스크 역할을, 대시보드는 잘 가다듬어진 가구의 모습을, 대시보드 위 커브드 디스플레이는 거실의 TV를 연상케 하는 실내를 구현할 수 있었다.
끝으로 카이 랭어 BMW i 디자인 총괄은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을 전했다. 그는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열린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동차 산업 전체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지켜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리된 생각을 반영해 질문을 던지라고 말한다. “과거부터 고수해 온 자동차 디자인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 수 있을까요?”라고 말이다.
글 / IT동아 김동진 (kdj@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