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화물차를 보유하고 화물차 기사로 일하는 임모 씨(52)는 일감을 소개해준다는 운송회사와 2006년 계약한 뒤 17년간 시달리고 있다. 당시 화물차 취득세를 내주겠다는 이 회사 임원 말을 믿고 524만 원을 입금한 게 화근이었다. 그는 세금 체납으로 집을 압류당했다.
압류를 자비로 풀고 알아보니 그가 건넨 돈은 임원이 가로챘다. 그는 매달 내는 지입료를 취득세만큼 면제해달라고 했지만, 회사 측은 “임원 개인 잘못”이라며 버텼다. 억울해서 지입료를 안 냈더니 재계약 시점에 회사는 연 24%의 연체 이자를 내라고 했다. 당장 생계가 급한 임 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재계약했고, 이후에도 차량을 바꾸며 도장값 명목으로 800만 원을 내야 했다. 그는 “지입제는 기사가 을(乙)인 불투명한 거래 조건”이라며 “올 초만 해도 화물 운임제가 바뀌며 지입제가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아무 소식도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의 지난해 파업 이후 정부가 새 운임제인 표준운임제를 도입하고 화물 운송업계 고질적 문제로 꼽히는 지입제를 폐지하기로 했지만 국회에 발목을 잡혀 전국 화물차 기사 20만여 명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화물연대도 지입제 폐지에 찬성하며 정부·여당 안을 놓고 논의하기로 했지만, 야당이 기존 안전운임제 연장을 고수하며 국회에서 표류 중이다.
올 초 안전운임제 일몰 이후 10개월째 제도 공백이 이어지며 지입차 화물차 기사들은 ‘번호판 사용료’나 ‘도장값’ 납부 등을 감당하고 있다. 지난해 2차례 파업으로 5조1000억 원으로 추산되는 경제적 손실을 일으킨 화물차 집단운송 거부 사태의 불씨가 살아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국회와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안이 6월 국회에 상정된 후 논의가 전무한 상황이다. 지난해 화물연대는 안전운임제 확대를 내걸고 2차례 파업했다가 철회했고, 올해 1월 1일 안전운임제가 일몰돼 새 운임제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올해 2월 당정이 화물운송산업 정상화를 위해 지입 운송회사를 퇴출하고 표준운임제를 도입하기로 해 올해 6월 개정안이 마련됐다.
국회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화물연대는 김 의원의 개정안(정부안)을 중심으로 우선 논의하기로 했다. 화물연대 관계자는 “지입제 개선안이 시급해 정부안으로 먼저 논의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야당에도 입장을 전달했는데 깜깜 무소식”이라고 했다.
화물업계 혼란이 커지고 있지만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안전운임제를 연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국회 통과 여부는 미지수다. 국회 관계자는 “야당이 안전운임제 연장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최근엔 표준운임제에 대한 당 입장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의를 피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 1월 안전운임제가 일몰된 이후 약 10개월 동안 제도 공백이 벌어지면서 화물차 기사들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 국토부는 전국 사업용 화물차량 45만 대 중 지입 차량은 20만여 대로 추산한다. 경기 지역 트레일러 화물차주인 이모 씨(59)는 “최근 차량을 바꾸면서 ‘도장값’으로만 800만 원을 냈다”며 “운임이 깎여 반발했더니 지입 운송회사에서 바로 계약을 해지하자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국회 논의가 지연되면 어렵게 마련한 법안이 폐기 수순을 밟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태가 장기화하면 지난해 막대한 산업계 피해를 낳은 화물연대 파업 못지않은 집단 행동의 불씨를 제공할 개연성이 있다. 하헌구 인하대 아태물류학부 교수는 “연내 국회 국토교통위를 통과하지 못하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법안이 폐기될 가능성이 크고, 향후 운송거부 사태가 또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화물차 지입제 |
화물차 기사가 자신의 화물차에 운송회사의 번호판을 빌려 다는 대신 월 20만~40만 원의 지입료를 내는 것. 2004년부터 시행된 '화물차 총량제'로 화물차 운송면허 신규 발급이 제한된다는 점을 악용해 운송회사들이 번호판(면허)만 빌려주는 '번호판 장사' 등으로 부당이득을 봤다는 지적이 나온다. |
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