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이후 한국, 미국, 유럽 업체들이 일제히 ‘휴지기’에 들어간 러시아 자동차 시장을 중국 업체들이 모두 잠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공장 매각을 결정한 현대차그룹으로서도 추후 러시아 시장 재진출 시 현지 로컬업체는 물론이고 중국 기업들과도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의 1∼10월 대러시아 승용차 수출액은 93억8452만 달러(약 12조 원)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10억7838만 달러와 비교하면 9배 가까이로 늘었다. 러시아는 중국의 전 세계 승용차 수출액 중 14.8%를 차지하며 중국의 최대 승용차 판매처로 부상했다.
중국의 약진은 현지 판매 순위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럽비즈니스협회(AEB)에 따르면 중국 브랜드들은 2년 전인 2021년 1∼3분기(1∼9월) 러시아 내 승용차 및 경형 상용차(LCV) 판매 ‘톱10’에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는 체리자동차, 하발, 지리, 오모다, 엑시드, 창안 등 6곳이 톱10에 들었다.
중국 업체들의 추가적인 진출도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시장조사업체인 오토스탯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탱크, 베이징자동차 등 올해에만 19개 중국 자동차 브랜드가 새로 진출했다. 이로써 러시아에서 차량을 판매 중인 중국 브랜드는 35곳으로 늘어났다.
중국이 러시아 시장에서 약진한 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러시아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2021년 1∼3분기만 해도 판매 상위권을 점령하던 한국의 기아(2위) 현대차(3위), 프랑스 르노(4위), 독일 폴크스바겐(6위) BMW(10위), 일본 토요타(7위) 닛산(9위) 등이 현지 공장 생산을 일제히 중단했다. 기아는 현지 딜러가 보유했던 물량이 뒤늦게 팔리면서 올해 10위에 턱걸이하고 있지만, 현대차는 10위권에서 자취를 감췄다.
러시아는 현대차그룹이 공을 들여왔던 시장이다. 1990년대부터 수출을 시작해 2010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공장을 준공했다. 2021년에는 현대차그룹 점유율이 20%가량 될 정도였다. 하지만 공장 생산 중단으로 인한 유지 비용이 누적되자 결국 현대차는 19일 임시이사회를 열고 현지 공장을 러시아 업체에 1만 루블(약 14만5000원)에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해당 공장의 일부 지분을 가진 기아도 20일 이사회에서 공장 매각 건을 승인했다.
현대차는 2년 내 원하면 공장을 시장가격에 되사올 수 있는 바이백 조항을 넣기는 했다. 1만 루블이라는 헐값에 팔았던 공장을 수천억 원을 들여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전쟁이 끝난 뒤 현지 판매를 재개하더라도 점유율을 단기간에 되찾아 오긴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사태를 겪으면서 2016년 8%대였던 현대차그룹의 중국 점유율이 1%대로 떨어져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는 일이 러시아에서도 재현될 수 있어서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중국 브랜드 자동차들이 가격이 싼 데다 예전에 비해 품질까지 좋아졌다”며 “추후 러시아 재진출을 결정한다면 고급 차량을 좀 더 앞세워 중국 업체들과 차별화하는 전략을 짜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재희 기자 h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