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현지 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가전전시회(CES). 현장에서 만난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에게 ‘라스베이거스에 와서 카지노에 한 번 가봤는지’ 묻자 예상 밖 답변이 돌아왔다. 1970년생 개띠인 정 부회장은 “50년 가까운 인생을 돌아보니 잘 살았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고 후회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더 성실하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전했다. 도박은 위기의 연속이다. 가끔 이길 때도 있지만 잠시뿐. 위기는 이내 다시 찾아온다. 위기가 일상인 삶 속에서 재계 2위 대기업을 이끄는 오너 경영인의 고민도 깊어 보였다. 그는 이날 기자와의 만남에서 각종 현안에 대한 속내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정 부회장은 지난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여파로 중국에서 현대차 판매량이 급감했다. 지난해 1∼11월 중국 판매량은 66만4358대로 전년 동기보다 33% 줄었다. 정 부회장은 “위기가 굉장히 심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정 부회장은 위기 속에 상품 조직 디자인 등 모든 부문에서 변화를 시도했다. 지난해 중국 현지 맞춤형 차종 개발을 위한 제품개발본부도 중국에 세웠다. 그는 “좋은 주사를 맞은 것 같다”며 “작년에 겪은 어려움은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온몸이 아린 주사를 맞은 만큼 효과는 곧 나타날 것으로 그는 기대했다. 정 부회장이 밝힌 올해 중국 판매량 목표는 90만 대다. 사드 타격을 받기 전인 2016년 판매량 114만 대에 약간 못 미친다. 정 부회장은 “내년에는 완전히 회복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수소전기자동차는 정 부회장과 현대차가 스스로 선택한 도박이다. 현대차는 8일 CES 프레스 콘퍼런스에서 2세대 수소차 ‘넥쏘’를 공개했다. 일각에서 수소차 개발이 맞는 방향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정 부회장은 수소차 성공을 확신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미래 수소차는 1회 충전으로 1000km를 갈 수 있다. 나라면 한 번 충전해서 일주일 동안 탈 수 있는 수소차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자동차산업은 과거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자율주행자동차 경쟁이 가열되며 정보통신기술(ICT) 역량이 매우 중요해졌다. 정 부회장은 “첨단 자동차 개발을 위해 일하는 방식을 비롯한 모든 부분이 달라져야 한다”며 “현대차는 ICT 기업보다 더 ICT 기업과 같아지는 게 중요하고 큰 과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정 부회장은 앞으로 동남아 자동차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동남아는 일본 업체들이 90% 이상 장악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여러 기업들이 경쟁을 벌이는 것보다 오히려 낫다. 확실한 차별화 전략을 가지고 들어간다면 시장 점유율 25%는 바로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CES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챙길 일로 ‘노사 임금협상’, ‘해외 권역별 책임경영 체제 마련’, ‘신형 벨로스터 출시’를 꼽았다. 첫 번째는 현대차에 대한 국민 여론을 악화시키는 핵심 이슈, 두 번째는 아버지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신년사에서 가장 앞세운 핵심 과제, 세 번째 언급한 벨로스터는 정 부회장이 직접 콘셉트를 고안해 개발된 자동차다. 벨로스터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그야말로 쉬운 일이 없다. 스스로 말했듯이 도박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라스베이거스=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