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첩보영화의 대명사로 꼽히며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007 시리즈 최신작 ‘007 노 타임 투 다이’도 올 4월 개봉 예정이었다. 그러나 극장 개봉이 여의치 않아, 배급사는 11월로 개봉 일정을 잠정 조정했다. 007 시리즈의 25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은 다섯 번째 배우인 대니얼 크레이그의 시리즈 마지막 출연작으로 알려져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 크레이그가 주연을 맡은 007 시리즈는 전작들에 비해 한층 더 진지하고 밀도 높은 표현이 두드러져, 새로운 팬층을 만든 것은 물론 여러 편이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애호가에게도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은 영화들은 좀 더 특별한 기억을 남겼다. 007 시리즈의 상징적 아이템인 ‘본드 카’, 그것도 1대 제임스 본드였던 숀 코너리와 함께 선보인 오리지널 모델인 애스턴 마틴 DB5가 비중있게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크레이그가 본드 역으로 데뷔한 ‘007 카지노 로얄’ 이후 DB5가 나오지 않은 시리즈는 2008년에 개봉한 ‘007 퀀텀 오브 솔러스’뿐이다. DB5는 개봉 예정인 ‘007 노 타임 투 다이’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이미 공개된 공식 예고편 영상에서 활약상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본드 카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 본드가 주로 타고, 영국 비밀정보부 MI6의 특수 부서인 Q 브랜치에서 개발한 특수장비를 단다는 설정으로 007 시리즈의 재미를 더하는 아이템이었다. 그동안 시리즈에 등장한 본드 카로는 로터스 에스프리, BMW Z3와 Z8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애스턴 마틴에서 내놓은 차들 중에서도 DBS, V8 밴티지 볼란테, V12 뱅퀴시, DBS V12 등이 여러 편에 나뉘어 등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깊이 각인된 것은 역시 DB5다.
DB5가 처음 007 시리즈 영화에 등장한 것은 1964년에 개봉한 ‘007 골드핑거’였다. 이 영화는 코너리가 주연한 두 번째 007 시리즈이면서, 시리즈가 본격 스파이 액션물로 자리를 잡은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의 원작인 이언 플레밍의 소설에 나오는 본드 차와는 다르지만, ‘007 골드핑거’ 제작 당시 애스턴 마틴의 최신 모델이던 DB5는 영화에 좀 더 현실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이후 DB5는 후속작인 ‘007 선더볼 작전’에 한 번 더 등장하는 데 그쳤지만, 코너리와 더불어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한 기억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007 시리즈에 DB5가 등장한 것은 영화계와 자동차 업계의 협업이 가장 큰 시너지 효과를 낸 사례로 꼽힌다.
단순히 영화 제작용 소품으로 여길 수 있지만, 영화로 얻은 유명세는 오랫동안 DB5는 물론이고 럭셔리 스포츠카 브랜드인 애스턴 마틴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 DB5는 당시 기준으로 호화로운 꾸밈새와 세련된 디자인이 좋은 평을 얻기는 했지만, 성능이 대단히 탁월한 것도 아니었고 판매량도 많지 않았다. 2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생산된 DB5는 1000대가 조금 넘었을 뿐이고, 그중에서 본드 카의 바탕이 된 2도어 쿠페 모델은 898대에 불과했다.
오히려 본드 카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차의 가치가 높아진 것은 생산이 중단된 뒤의 일이다. 요즘 외국 유명 클래식카 경매에서는 잘 관리된 DB5 쿠페의 낙찰가가 100만 달러(약 12억 원)를 가볍게 웃돌고, 지난해 8월에 미국 몬터레이에서 열린 경매에서는 ‘007 선더볼 작전’이 개봉된 1965년에 영화 제작사가 홍보용으로 썼던 차가 무려 638만5000달러(약 76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애스턴 마틴은 최근 첫 DB5 골드핑거 컨티뉴에이션 모델을 완성해 구매자에게 인도했다. 이번에 완성된 것을 포함해 모두 25대가 만들어질 예정이고, 나머지 24대의 생산도 올해 안에 마무리되어 주인을 찾아가게 된다. 소장 가치와 더불어 특별한 재미에 초점을 맞춘 차인 만큼, 이 차들은 정식 번호판을 달고 일반 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차를 손에 넣은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차와 함께할 때마다 제임스 본드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