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굿우드 페스티벌에서 주목받은 이벤트 중 하나는 벤틀리의 기념행사다. 올해 벤틀리가 터보 엔진을 얹은 모델을 내놓은 지 40년이 된 것을 기념해, 역대 대표 모델을 몰고 행사장에 모여 퍼레이드를 벌인 것이다. 벤틀리는 1982년 3월에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서 첫 터보 엔진 모델인 뮬잔 터보를 공개했고, 그해 9월부터 구매자에게 인도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벤틀리는 뮬잔 터보를 시작으로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래서 벤틀리에 있어 터보 엔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벤틀리는 터보 엔진 모델을 내놓기 훨씬 전인 1920년대 말에 슈퍼차저를 사용한 ‘블로워 벤틀리’라는 경주차를 만들기도 했다. 터보차저와 슈퍼차저는 엔진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압축하는 압축기를 작동하는 방식만 다를 뿐 원리는 같다. 창업자 월터 오언 벤틀리는 블로워 벤틀리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 경주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사례도 드물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강력한 성능으로 경주를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벤틀리 역사에서 기념비적 모델 중 하나로 꼽힌다.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가운데 처음으로 터보 엔진을 쓴 곳은 마세라티다. 1981년에 선보인 비투르보(Biturbo)를 시작으로 그 뒤를 이은 여러 모델에 터보 엔진을 썼다. 두 개의 터보차저를 달았다는 뜻의 모델 이름이 알려주듯, 비투르보는 양산 승용차 중 처음으로 두 개의 터보차저를 단 엔진을 써서 화제가 되었다. 초기에는 멋진 스타일과 강력한 성능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품질과 신뢰성이 발목을 잡아 판매량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터보 엔진 출시는 한 발 늦었지만 벤틀리는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터보 기술에 주목해 시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온 뮬잔 터보는 벤틀리 역사에 긍정적 반전을 가져왔다. 엔진은 전통적인 V8 6.75L 가솔린이었지만, 200마력에 머물렀던 출력은 터보차저를 더하면서 300마력으로 크게 올라갔다. 아울러 가속 성능도 30%나 향상되었다. 럭셔리 승용차이면서도 운전자에 초점을 맞춘 벤틀리의 성격에 잘 맞는 변화였다.

터보 엔진이 강력한 성능을 보장했지만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들이 일찍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기술적 한계 때문이었다. 터보차저는 앞서 이야기했듯 엔진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압축하는 동력원으로 배출가스를 활용한다. 그런데 엔진이 아주 느리게 회전할 때에는 배출가스가 나오는 힘이 약해 압축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즉 엔진 회전수가 특정 수준까지 올라가기 전에는 출력 향상 효과가 적다. 그러다가 엔진이 충분히 빨리 회전해 압축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출력이 높아지고 가속 반응이 빨라진다.
이 같은 특성은 주행 특성을 거칠게 만들고 차를 다루기 어렵게 만들었다. 럭셔리 승용차에서 중요한 부드럽고 편안한 주행 감각에는 방해가 되는 특성이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고 자동차 업체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세심하게 조율한 덕분에 부드러운 가속감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벤틀리가 뮬잔 터보의 엔진을 개발할 때에도 편안하고 다루기 쉬운 특성에 초점을 맞췄다. 극한의 고성능을 추구하기보다는 운전자가 부드러움과 넉넉함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조율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던 셈이다. 한때 벤틀리와 모기업이 같았던 롤스로이스도 1994년에 벤틀리의 기술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터보 엔진 모델을 내놓았다.
터보 엔진이 만들어내는 넉넉한 힘과 시원스러운 주행감각이 주는 매력은 컸다. 결국 벤틀리는 1997년부터 터보 엔진을 기본으로 얹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1년에 롤스로이스에 인수된 뒤로 오랫동안 롤스로이스의 쌍둥이 모델만 만들었던 벤틀리는 터보 엔진으로 차별화에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롤스로이스에는 없는 독자 모델을 개발해 브랜드 독립의 바탕을 다질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의 터보 엔진은 힘의 여유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첨단 전자제어 기술과 배출가스 정화 기술이 어우러져 넉넉한 힘과 환경에 대한 고려까지 모두 담고 있다. 벤틀리는 앞으로 모든 모델에 순수 전기 동력계를 갖추겠다고 선언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모든 벤틀리의 심장은 터보차저와 함께할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