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싱가포르에서 문을 연 현대자동차그룹의 싱가포르글로벌혁신센터(HMGICS) 전경.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16일 현대자동차그룹이 싱가포르 주롱혁신단지에 문을 연 ‘싱가포르글로벌혁신센터(HMGICS)’ 3층 자동차 생산 공장. ‘셀(Cell)’이라 불리는 작은 방처럼 생긴 타원형 공간 10여 개가 배치돼 있었다. 셀마다 작업자 한 명이 로봇 개 ‘스폿’과 함께 일하는 중이었다. 흔히 자동차 공장을 생각하면 떠올리는 컨베이어 벨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3층 생산공장에서 작업자가 차량을 조립하자 로봇개 ‘스폿’이 따라다니며 품질 검사를 하고 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획일화된 차량을 생산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이 공장은 고객들의 다양한 주문에 맞춰 유연하게 차량을 만들 수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셀 안의 작업자는 영화 ‘아이언맨’에서처럼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상체에 둘렀다. 8시간 동안 고개를 들고 차량 하부를 쳐다보는 작업자의 통증을 완화하는 특수 장치다.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제작한 스폿은 작업자를 졸졸 따라다녔다. 작업한 부분을 스폿이 촬영하면 인공지능(AI)이 실시간 검사를 한다. 셀 앞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정확도 ‘99.3%’란 판독 숫자가 떴다. ● 현대차 공장 미래가 한눈에
HMGICS는 앞으로 전 세계 현대차그룹 자동차 생산 공장에 적용될 시설을 한발 앞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실험실’이다. 자동차 생산뿐 아니라 연구개발(R&D), 고객서비스까지 동시에 이뤄진다. 전동화, 자율주행, 목적기반모빌리티(PBV) 등 모빌리티 유형이 다양화되며 이를 반영할 새로운 생산 방식의 ‘테스트베드(시험시설)’를 담당한다.
자동차 산업은 100여 년 전 ‘컨베이어 벨트(포디즘)’ 방식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정 차량을 대량 생산하는 방식으로 생산성을 높였다. 셀 방식은 정반대다. 각기 다른 고객의 주문에 맞춰 셀마다 다른 부품으로 다른 차량을 만든다. 유연하게 생산 방식을 바꿀 수 있어 다품종 소량 생산에 적합하다. 정홍범 HMGICS 법인장은 “기존 공장은 대형 식당에서 같은 라면을 대량으로 만든다면 셀 방식은 각자 원하는 수제 라면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HMGICS는 2020년 착공한 축구장 6개 규모, 지상 7층 높이의 건물이다. 큰 공간이지만 근무 중인 직원들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 생산 공정이 로봇과 AI를 통한 자동화에 기반해서다. 직원은 총 280명에 불과한데, 이 중 절반가량은 연구 인력이다. 각 셀에서 조립한 차체를 옮길 때는 자율주행로봇(AMR)이 셀과 셀 사이를 오갔다. 4층 커맨드센터에서는 공장 전체를 디지털 공간에 옮겨둔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해 문제점을 찾아냈다. 현대차는 향후 HMGICS의 모든 공정의 문제 해결과 분석을 100% 스스로 해결하는 ‘자율공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HMGICS에서 다양한 실험을 거쳐 향후 현대차의 다른 글로벌 공장에 적용할 계획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전기차 ‘아이오닉5’를 생산 중이다. 연간 3만 대 생산이 가능하다. 앞으로는 고객 개개인의 성향과 기호를 반영한 PBV와 미래항공모빌리티(AAM)도 생산할 계획이다. 미국 조지아 공장과 울산 전기차(EV) 전용 공장 등 신공장에도 단계적으로 HMGICS의 신기술을 도입한다.
● 7억 동남아 공략 시너지 효과
현대차그룹이 싱가포르에 HMGICS를 지은 것은 이곳의 문화지리적 특성과 관계가 깊다. 싱가포르는 인구 600만 명에 국가의 끝과 끝이 차량으로 30분이면 다다르는 작은 나라다. 정 법인장은 “작은 도시다 보니 어떤 모빌리티를 어떻게 커스터마이징(맞춤 제작)할지 고객 피드백을 발 빠르게 받아 테스트할 수 있다”고 했다.
싱가포르가 혁신 수용성이 높은 국가인 데다 정부 지원이 탄탄한 점도 주요한 이유로 꼽힌다. 싱가포르 정부는 2040년까지 모든 자동차를 친환경차로 전환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모빌리티 혁신을 주도 중이다. 수많은 주요 글로벌 기업들이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어 다양한 협업을 시도할 수도 있다.
혁신을 선도하는 싱가포르를 공략해 7억 명 규모 동남아 시장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동남아 최대 차량공유 업체인 그랩이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시장을 확대해온 것과 비슷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미국 시장에 현대차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성과가 있다”며 “정의선 회장(사진)은 동남아 시장 투자를 꾸준히 확대하며 또 다른 신시장을 개척해 본인만의 색깔을 내려는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21일 열린 HMGICS 준공식에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로런스 웡 싱가포르 부총리 등이 참석했다. 정 회장은 환영사에서 “싱가포르와 현대차그룹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공통의 혁신 DNA를 갖고 있다”며 “HMGICS를 통해 인류의 발전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혁신적인 모빌리티 솔루션을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싱가포르=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