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자동차 화재 진화의 골든타임은 5분이라고 한다. 소방산업기술원이 진행한 실험을 보면 차량 엔진룸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3∼5분 내에 엔진룸 전체로 불길이 번지고, 10분이면 운전석까지 확산된다. 1시간이 지나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차량은 남김없이 다 타버린다. 이 때문에 차량 화재는 초기 대응에 실패할 경우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 쉽다.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도 5t 화물트럭의 엔진에서 발화된 불에서 시작됐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골든타임이 더 짧다. ‘배터리 열폭주 현상’ 때문이다. 전기차에 장착된 리튬이온배터리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온도가 1000도까지 치솟고,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산소와 가연성 가스까지 배출된다. 화염에 휩싸이면 손쓸 틈이 없는 만큼 신속한 초동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전기차 화재가 발생했을 때 행동 요령을 아는 운전자는 극히 드물다. 심지어 전기차 제조업체들조차 엉터리로 된 화재 대응 매뉴얼을 소개하고 있다.
▷전기차 선두 주자인 미국 테슬라는 긴급 대응 매뉴얼에 ‘고압 배터리에 난 불은 물로 꺼야 한다’, ‘물을 직접 배터리에 뿌리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물의 양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다. 전기차 화재를 진압하는 데 최소 물 1만 L가 필요한데, 일반 소방차 한 대가 싣고 다니는 소화용수가 3000∼5000L 정도다. 미국에서는 테슬라의 고가 세단 ‘모델S’에서 난 화재를 완전히 진화하는 데 물 10만6000L가 쓰였는데, 일반 가정에서 2년 동안 사용하는 양이다.
▷기아, KG모빌리티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매뉴얼에 ‘반드시 전기 화재 전용 분말 소화기로 진화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화재를 진압할 전용 소화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도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있지도 않은 소화기를 반드시 쓰라고 소비자들에게 알려준 셈이다. 테슬라는 2016년식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X’의 매뉴얼에서 ‘다 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화재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건 소비자 우롱을 넘어 안전을 위협하는 처사다. 일부 전기차 업체들이 ‘영업 비밀’, ‘본사 방침’을 이유로 배터리 제조사 공개를 거부해 구설에 올랐는데 엉터리 매뉴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세계 각국이 전기차 화재 진압 방법, 열폭주 방지 기술 등을 알아가는 단계라 해도 자동차 제조업체의 무책임한 매뉴얼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전국을 덮친 ‘전기차 포비아’를 진화하려면 올바른 정보를 담아, 제대로 된 화재 대응 매뉴얼부터 만드는 게 첫걸음이 돼야 할 것 같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