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싱슈트를 차려입은 운전자가 차량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차량은 굉음을 내며 300m가량의 슬로프를 치고 올라 정상에 섰다. 중간중간 좌우로 밀리고 미끄러졌지만 끝내 목표지점에 도달했다. 정상에 올라선 차량은 좌로 크게 회전해 슬로프를 거꾸로 내려왔다. 중간에 세워진 러버콘을 피해 스키를 타듯 S자로 활강한 차량이 출발지점에 서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2분.

이날 슬로프에 오르고 진흙탕길을 달린 차량은 일본 스바루자동차(이하 스바루)의 중형 세단 레거시와 소형 SUV 포레스터.

스바루 차량을 설명할 때 미국인이 즐겨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살 때부터 폐차 때까지 보닛을 한 번도 안 열어도 되는 자동차’다. 실제로 그렇진 않겠지만 그만큼 잔고장이 없고 내구성이 뛰어난 차로 유명하다. 스바루는 약 2년 전 레거시와 포레스터, 아웃백 등 3총사를 앞세워 한국에 진출했지만 지난해 664대를 파는 데 그쳤다. 한때 국내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그러저러한 소문을 일축하고 올해 750대 판매를 목표로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시승 차량은 2011년형으로 21년 만에 새롭게 바꾼 3세대 박서엔진을 장착했다. 2.5ℓ 4기통 가솔린 엔진에 4단 자동변속기를 탑재해 최고출력 172마력, 최대토크 24.1kg·m을 발휘한다.

스바루는 어쩌면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브랜드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디자인을 자주 바꾸지도 않고 내부도 지극히 단순하다. 첨단 전자장치나 편의사양도 거의 갖추지 않았다. 오로지 수평대향 박서엔진의 주행성능과 안전성, 밸런스 등 기계적인 강점을 앞세워 생존해오고 있다. 오죽하면 직원들도 “성능만 좋으면 됐지 디자인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을 한다.
스바루가 치열한 경쟁에서 50년 넘게 살아남아 마니아층을 형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포레스터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꽉 막힌 서울 도심을 벗어나 서울춘천고속도로에 오른 뒤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반 박자 느린 가속감은 불만이지만, 고속 영역에서 흔들림 없는 부드러운 주행성능은 일품이다. 직선로에서 끝까지 가속 페달을 밟자 속도계가 180km/h를 넘나들었지만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초고속에서 안정적인 차량은 일상적인 주행 영역에선 더욱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다.

정숙성도 뛰어났다. 노면소음과 엔진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를 방해할 정도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엔진회전수 3000rpm을 넘는 고회전 영역에서는 소음이 내부로 들어왔다. 포레스터는 거친 도로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패이거나 높낮이가 다른 도로에서도 차체가 튀지 않고 충격을 잘 흡수하며 달렸다. 묵직한 대형 세단에서나 느낄 수 있는 출렁거림과 비슷한 느낌이다.
대칭형 AWD시스템은 날씨나 도로 상태와 관계없이 4개의 바퀴 모두에 최적의 토크를 분배한다. 이는 어떤 조건에서도 균형 잡힌 핸들링이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박서엔진과 트랜스미션을 차량의 중심선상에 일직선으로 배치해 무게중심이 정중앙에 있다. 이 덕분에 코너링 때 정밀한 핸들링과 최상의 밸런스를 느낄 수 있다. 차가 달릴 때 도로와 맞닿은 타이어의 면적은 손바닥 크기에 불과하다. 손바닥 4개 넓이의 타이어가 얼마나 골고루 도로에 밀착해 달리는지가 주행성능을 결정한다.

포레스터가 시장에서 인기 높은 또 하나의 이유는 고장력 강판에 6개의 에어백을 갖춘 안전성이다. 포레스터는 지난해까지 미국에서 3년 연속 ‘가장 안전한 차’에 선정됐다. 그 밖에 선루프가 넓어 탑승자에게 개방감을 주고, 버튼 하나로 뒷좌석을 6대 4로 나눠 접어 화물공간으로 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포레스터를 시승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낮은 연비다. 20km/ℓ를 넘나드는 유럽의 SUV가 수두룩한 시대에 가솔린 차량의 공인 연비 10.6km/ℓ는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 판매가격은 3790만 원이다.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