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출시된 ‘블랙 배지 스펙터’는 성능의 정점을 다시 정의한 롤스로이스다. 역대 가장 강력한 모습으로 내재된 질주 본능을 깨우는 걸작. 고요함과 폭발력의 경계를 허물며 ‘최고’의 의미를 되새기는 존재다.
일본 도쿄 대표 부촌인 아오야마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곳에는 특정 고객들만 허락하는 마가리가와 클럽이 자리하고 있다. 블랙 배지 스펙터는 이곳 마가리가와 서킷에서 고상한 자태를 뽐내며 한국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로 1시간30분을 달려 마가리가와에 도착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그 유명한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다. 어두운 다크 크롬으로 마감된 이 환희의 여신상은 블랙 배지 특유의 특별한 가치를 전달했다. 롤스로이스 상징인 더블 R 로고도 이날따라 더욱 빛이 났다.

그 뒤를 잇는 검정색 아이스 블랙 보닛과 베이퍼 바이올렛으로 뒤덮인 차체 색상이 서로 어우러져 블랙 배지 만의 희소성을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1980년대 유럽 클럽 문화의 네온 라이트에서 영감을 받은 이 독특한 색은 태양 아래서 놀랍도록 변화무쌍한 색채를 드러냈다.
전면부 판테온 그릴은 내부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백라이트 기능을 더해 화려해졌다. 마치 밤을 밝히는 신전 같은 웅장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릴 배경 색은 취향에 따라 총 네 가지(테일러드 퍼플·포지 옐로우·샤르트뢰즈·찰스) 중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블랙 배지 스펙터는 겉모습만으로도 강렬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 안에서 시작된다.
마가리가와 서킷은 온전한 블랙 배지 스펙터를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산길을 그대로 옮겨 낸 고난도 코스 덕분에 차량 성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운전석이 오른쪽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블랙 배지 스펙터는 영국에서 느낄 법한 감성을 일본에서도 그대로 전했다.
롤스로이스가 이번에 새로운 스펙터를 서킷에 올린 의도는 분명했다. 조용한 권위를 유지하면서 역대급 주행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이 차는 익숙한 블랙 배지 공식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82마력의 출력 증가와 섀시 개선을 통해 성능 한계를 한층 끌어올렸다.

블랙 배지 스펙터는 철저히 고객 중심 관점에서 만들어진 차다. 개발 단계에서 수십 만 km에 달하는 기존 블랙 배지 고객들의 익명화된 주행 데이터를 분석해 실제 사용 패턴에 기반한 최적의 성능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롤스로이스가 자체 개발한 스포츠 모드, 즉 ‘인피니티 모드’ 근간이 됐다. 이전 블랙 배지 모델들에는 변속 반응성과 가속 반응을 높여주는 로우 세팅이 있었지만, 스펙터 인피니티 모드는 훨씬 더 많은 하드웨어를 다시 조율했다.
스티어링 휠 좌측 ‘∞’ 버튼을 누르면 계기판이 화사한 색으로 물들면서 이 모드가 켜진다. 인피니티 모드에선 차량 전체 성능을 느낄 수 있다. 기본 출력인 584마력 대신, 최대 659마력과 최대토크 109.6kgm 토크를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전기모터 두 개를 완전히 개방해 차량의 최대 퍼포먼스를 끌어내는 설정이다.

인피니티 모드가 적용된 블랙 배지 스펙터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차로 변신한다. 실제로 고저차가 심하고 코너링이 많은 마가리가와 서킷을 아주 평온하게 거닐고 있었다.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완벽하게 유지되면서 다양한 환경에서 자세 흐트러짐 하나 없이 험로를 헤쳐 나갔다. 롤스로이스 전매특허인 ‘매직 카펫 라이드’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크리스토퍼 하디 롤스로이스모터카 스펙터 제품 매니저는 “롤스로이스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추가한다”며 “그래서 무게가 늘어나는 반면 롤스로이스 모든 차량의 실내는 평온하고 고요함이 느껴지고, 전기차 스펙터는 승차감이 한 단계 더 올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스피리티드 모드를 활용할 수 있는 것도 블랙 배지 스펙터만의 특권이다. 롤스로이스식 론치 컨트롤인 이 장치는 거구를 단숨에 슈퍼카로 만들었다. 작동법은 간단하다. 왼발은 브레이크, 오른발은 가속 페달을 밟은 채로 대기하면, 차체가 살짝 떨리며 압축된 토크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온다. 그리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순간, 무려 3톤의 거구가 정지 상태에서 4.3초 만에 시속 100km를 돌파한다.
속도계 숫자가 미친 듯이 치솟고 있음에도 실내는 완벽히 고요하다. 시속 200km를 넘어서도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롤스로이스 특유의 디지털 가속음 뿐, 그마저도 은은하다.
연속 코너링에서는 이 차량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3톤에 달하는 무게는 아무리 우수한 제동 시스템이라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물론, 진짜 목적은 트랙에서 랩타임을 겨루는 게 아니다. 거대한 몸집으로 악조건에 대처하는 모습은 이 차가 얼마나 재미있게 롤스로이스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블랙 배지 스펙터는 본연의 진가를 드러낸다. 개량된 댐퍼, 향상된 안티롤 시스템, 그리고 조율된 스티어링은 이 차를 더욱 민첩하고 즐거운 차로 만든다. 코너 진입은 더 빠르고, 차체도 안정적이다. 여기에 폭발적인 가속까지 따라온다.

이 모든 주행 성능의 향상은 롤스로이스 고유 정숙함이나 편안함을 전혀 해치지 않았다. 전기 파워트레인 덕분에 소음이 줄어들고, 102kWh 용량의 배터리 팩 자체가 일종의 방음재 역할을 해 외부 소음을 억제한다.
1회 충전시 최대 주행 가능거리는 398km다. 전기차 시장에서 이 같은 수치는 혁신적이진 않다. 하지만 평균 롤스로이스 오너는 1년에 약 5100km만 주행한다. 대부분 여러대의 차량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스펙터는 다용도 차량이 될 필요가 없다.
블랙 배지 스펙터는 지금껏 몰아본 차량 중 가장 조용했다. V12 엔진을 얹은 롤스로이스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지만, 이 전기차는 그 마지막 1%까지 정숙성을 완성해냈다.

운전자의 손을 완전히 놓는 순간까지 우아함은 계속된다. 블랙 배지 스펙터에는 자율주행 기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동 주차 기능이 탑재돼 있다.
운전자가 주차 공간을 감지할 수 있도록 천천히 주행하다가 디스플레이에 ‘자동 주차 가능’ 아이콘이 표시되면 이를 터치한다. 그 다음 핸들에서 손을 떼고,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면 차량이 모든 조작을 스스로 수행하기 시작한다.
조향, 가속, 브레이크, 기어 변속까지 전 과정이 자동으로 이뤄진다. 차량은 지정된 주차 공간에 정확하게 정렬돼 들어간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숙련된 기사가 몰듯 부드럽고 정교하다.

주차가 완료되면 차량은 완전히 멈춘 뒤 경고음을 통해 완료 사실을 알리고, 센터 디스플레이엔 문 개방 가능 범위와 장애물 정보까지 시각적으로 제공한다. 만약 공간이 좁아 도어가 완전히 열리지 않을 경우, 이를 인지해 경고를 띄운다.
더 놀라운 점은 ‘후진 보조’ 기능이다. 차량은 방금 지나온 진입 경로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어, 버튼 한 번으로 동일한 경로를 따라 정확하게 후진이 가능했다. 좁은 골목이나 주차장 진입로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기능이다.
실내에서는 그 화려함에 다시 한 번 숨이 멎는다. 도어에 새겨진 스타라이트 도어는 수천 개의 광섬유 조명을 통해 은하수를 연상시킨다. 천장뿐 아니라 도어 전체까지 별빛이 내려앉은 듯하다. 블랙 배지 전용 테크니컬 파이버는 카본과 금속을 섞어 고급스러움과 경량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대시보드에도 인피니티 로고가 조명과 함께 새겨져 있다. 고객이 원하는 실내 색상 조합에 맞춰 트레드 플레이트와 가니쉬 색상 역시 맞춤 제작된다. 마감, 가죽, 조명, 소재 모두에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롤스로이스’를 위한 비스포크 철학이 살아 숨 쉰다.
정진수 기자 brje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