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24일(현지시간) 오전 8시, 전 세계 주요 언론들이 이곳 라이프치히의 상징에 모여들었다. 포르쉐 SUV 시대를 연 ‘카이엔’ 최신작을 가장 가까이서 들여다보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이날 포르쉐는 ‘카이엔 일렉트릭 기술 워크숍’을 마련하고, 출시에 앞서 신차 핵심 기술을 미리 소개했다.
2002년 처음 등장한 카이엔은 현재까지 글로벌 누적 판매 100만 대를 돌파하며 포르쉐 역사상 가장 상공적인 모델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시장에서도 3만대 판매를 목전에 둘만큼 최고급 SUV 시장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차다.
카이엔 이력은 화려하다. 포르쉐는 실용성이 뛰어난 SUV 영역에 도전하면서 고성능 DNA를 살린 V8 엔진을 얹히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이보다 강력한 GTS 모델도 데뷔 6년 만에 공개했다. 2010년에는 브랜드 최초 하이브리드 모델을 출시하며 발 빠르게 전동화 전환 초석을 다졌다. 최근에는 전기 모드로 최대 90km를 주행할 수 있는 739마력 E-하이브리드까지 내놨다.
화려하게 진화해온 카이엔 계보는 마침내 순수 전기차로 이어진다. 파워트레인이 바뀌지만 카이엔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포르쉐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번 카이엔 일렉트릭 기술 워크숍에서 기조 연설을 맡은 마티아스 레더러 포르쉐 품질 검증 및 확인 부문 총괄 사장(사진)은 “신형 카이엔은 포르쉐 본질을 잃지 않은 다재다능한 모델로 거듭났다”며 “전통과 기술, 감성과 성능의 경계에서 포르쉐는 이번에도 가장 조화로운 해답을 찾아냈다”고 강조했다.
카이엔 일렉트릭은 포르쉐가 가진 기술적 역량을 집약한 결정판으로 평가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고전압 시스템 ▲주행 성능 ▲인테리어 디자인 등 세 가지 핵심 기술을 중심으로 범접할 수 없는 독자적 기술력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포르쉐는 이를 보다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익스피리언스 센터에 특별한 체험 공간을 마련했다. 각 공간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마치 ‘비밀의 방’처럼 설계돼 있었다. 방문을 하나씩 열고 들어설 때마다 포르쉐 기술의 깊이와 무게감이 오롯이 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LG 113kWh 고전압 배터리 탑재
양방향 열 제어로 최상 성능 유지
카이엔 일렉트릭 기술 워크숍 현장에서 가장 큰 호기심을 자극한 건 단연 고전압 시스템이었다. 고성능 전기차에서는 고용량 배터리를 넣는 것만으로는 해답이 될 수 없다. 열 제어·무게 배분·공간 효율성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뤄야 비로소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르쉐는 카이엔 일렉트릭에 LG에너지솔루션 파우치 셀을 기반으로 한 113kWh 용량의 배터리를 탑재했다. 일반적인 전기차처럼 배터리를 하부에 얹는 방식이 아니라 차체 구조와 배터리를 통합 설계한 ‘기능 통합형’ 배터리팩이라는 점이 돋보였다.
막시밀리안 뮐러 포르쉐 에너지 시스템 매니저는 “공간 절약과 차체 강성 확보, 낮은 무게 중심까지 모두 고려한 설계”라며 “별도의 프레임 없이 차체에 직접 결합돼 기존 대비 약 7% 더 높은 에너지 밀도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모듈 단위 교체도 가능해 향후 유지관리 측면에서도 강점을 보인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배터리 양쪽을 동시에 냉각할 수 있는 ‘양방향 열 제어 시스템’이었다. 고속 주행이나 급가속 상황에서 배터리 온도가 급상승할 경우 이 시스템은 빠르게 온도를 안정시켜 언제나 최상의 성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와 함께 예측형 열관리 시스템은 운전자의 주행 경로·속도·외부 기온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배터리 온도를 능동적으로 조절한다. 주행 효율성과 배터리 수명까지 고려한 통합적인 에너지 관리 철학이 엿보였다.

카이엔은 최대 400kW DC 급속 충전 기능을 지원해 10%에서 80%까지 충전하는 데 단 16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는 장거리 이동이나 배터리 잔량이 낮은 상황에서도 충전 부담 없이 원하는 주행을 이어갈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11kW 출력의 무선 충전도 이용할 수 있다.
카이엔 최고출력 1000마력
직접 오일 냉각 시스템 도입
카이엔 일렉트릭 본질은 드라이브 시스템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외형과 달리 주행 성능은 슈퍼카 수준에 가깝고, 승차감은 플래그십 세단 파나메라에 견줄 만큼 부드럽다고 포르쉐는 설명한다. 강인함과 정제된 안락함이 극명하게 교차되는 이중성은 포르쉐가 카이엔 일렉트릭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주행 감성의 핵심이다.
최상위 모델 기준으로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 시간은 3초 미만, 200km/h까지는 8초 이내에 주파한다. 최고출력은 1000마력, 최대토크는 153kg·m에 달한다.
이 모든 수치는 단지 전기 파워트레인의 출력 덕분만은 아니다. 포르쉐가 완성한 정교한 하드웨어와 고급 주행 기술의 조합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리어 액슬(뒤축) 모터에는 모터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은 ‘직접 오일 냉각 시스템’이 처음 적용됐다. 이 기술은 모터 내부에서 직접 열을 배출함으로써 효율은 최대 98%까지 끌어올리고, 모터 부피는 줄이면서 내구성은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현장에서 만난 티모 헨 포르쉐 드라이브 시스템 매니저는 “개발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모터 내부를 직접 냉각하면서도 누유 없이 밀폐 상태를 완벽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며 “전기모터 내부로 오일을 순환시키기 위해선 기밀성 확보가 가장 중요한 기술 과제였는데 반복된 테스트와 설계 개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고, 결과적으로 모터 성능 저하 없이 장시간 고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냉각 시스템을 구현해냈다”고 말했다.
주행 중 감속 대부분은 브레이크가 아닌 전기 모터의 회생제동 시스템이 맡는다. 최대 600kW 회생제동 성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실제 주행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충분한 제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운전자는 다양한 회생 모드를 설정할 수 있다. 타력 주행과 함께 내연기관의 엔진 브레이크 감각에 가까운 중간 강도, 교통 상황에 따라 자동으로 반응하는 완전 자동 모드까지 상황과 취향에 따라 주행 질감을 조율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하나의 기술적 백미는 포르쉐가 새로 개발한 ‘액티브 라이드’ 시스템이다. 이 서스펜션 기술은 급가속·급제동·고속 코너링 상황에서도 차체를 수평에 가깝게 유지해 탑승자가 흔들림이나 쏠림 없이 안정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상의 와인딩 코스와 험로를 통과하는 시연 동안 실시간 측정값 역시 차체가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흔들림을 최소화한 것을 입증했다.
온로드에서는 접지력을 극대화해 고속에서도 안정감을 확보하고, 오프로드에서는 액슬 가동 범위를 넓혀 험지를 유연하게 주파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여기에 최대 3.5톤에 달하는 견인력까지 갖춰 전기 SUV 중에서도 드물게 강력한 실용성을 갖춘 점 역시 인상 깊었다.
비비엔 슈라이버 포르쉐 카이엔 드라이브 시스템 매니저는 “이번 카이엔 일렉트릭에는 컴포트 주행 모드도 새롭게 도입했다”며 “단순히 편안함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운전자에게 명확한 피드백을 주면서도 레이스 트랙에서도 달릴 수 있는 성능을 병행하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포르쉐는 앞으로도 스포티함을 절대 잃지 않되, 고객이 원하는 일상 속 편안함까지 아우르는 방향으로 진화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곡면 OLED ‘플로우 디스플레이’
왕의 품격 전하는 ‘페리패드’ 채택
사생활 보호 파노라믹 루프까지
카이엔 실내는 ‘운전자와의 연결’을 극대화하려는 포르쉐 철학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실내를 경험해보고 ‘품격’이란 단어가 머릿속 곧바로 떠올랐다. 차에 올라 시트에 몸을 맡기는 순간, 마치 왕의 옥좌에 앉은 듯한 기분이 밀려온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대시보드 전체를 감싸는 듯한 곡면 OLED 디스플레이. 일명 ‘플로우 디스플레이’였다. 센터 콘솔과 매끄럽게 이어져 표면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듯한 일체감을 자아냈다. 이 패널은 각도에 따라 빛이 우아하게 흘러 반사돼 실내 전체를 미래적이면서도 따뜻한 감성으로 채웠다.

바로 아래에는 손목 받침대가 은근히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이 ‘페리패드’는 운전자의 손목 피로를 줄여주면서도 조작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배려가 담긴 장치였다. 손을 올려보면 말 그대로 왕의 기품이 느껴지는 자세가 자연스럽게 취해졌다.
햅틱 피드백이 적용된 물리 버튼은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완벽하게 통합돼 있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촉이 정교하고 단단해 버튼을 누르는 것 조차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컵홀더는 탈착식으로 설계돼 공간 활용에 대한 고민도 엿보였다.
포르쉐는 카이엔 실내를 탑승객의 감성으로 표현하는 ‘무드 모드’도 개발했다. 실제 체험 모드로 ‘휴식’을 선택하자 조명이 은은하게 낮아지고, 시트가 부드럽게 기울면서 마사지를 시작했다. 반대로 ‘다이내믹’ 모드를 선택했을 때는 조명 톤이 확 바뀌며 계기판이 레이싱 모드로 전환됐다. 시트도 조금 더 타이트하게 조여지며 몰입감을 높였다.

뒷좌석 공간도 직접 들어가 봤다. 전동으로 정밀 조절되는 시트는 고급 세단 못지않게 안락했고,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가변식 파노라믹 루프였다. 손끝으로 버튼을 조작하자 루프 유리가 구간별로 천천히 불투명하게 변했다. 실내 전체가 따뜻한 빛으로 물들며 마치 프라이빗 라운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줬다.
도어 패널과 암레스트에는 표면 열선 기능이 적용돼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을 대는 순간 바로 따뜻해지는 이 섬세한 터치는 추운 날씨에 겉옷을 벗고 차에 탔을 때 진정한 배려로 다가올 디테일이다. 내부 소재는 30%가량을 친환경 재료로 구성했으며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개인 맞춤 사양도 가능하다고 한다.

사용자 경험도 빠짐없이 챙겼다. 포르쉐 최신 운영체제 ‘디지털 인터랙션’은 직관적인 위젯 기반 UI를 통해 손쉬운 조작을 지원한다. AI 음성비서 ‘보이스 파일럿’을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사용자에 즉시 반응하며 조명과 온도를 조절해준다는 게 포르쉐 측 설명이다.
차량 키 대신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로 문을 여는 디지털 키 기능은 최대 7명까지 접근 권한을 설정할 수 있어 가족 단위 사용자에게 특히 유용해 보였다.

마티아스 레더러 사장은 “전통적인 내연기관 SUV에서 시작해 하이브리드, E-하이브리드로 진화해 온 카이엔의 여정은 이제 순수 전기 SUV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주행 성능은 물론이고, 감성적 만족감과 실용성 및 지속 가능성까지 고려한 카이엔은 포르쉐다운 전기차를 만들기 위해 어디까지 고민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카이엔 일렉트릭은 올해 말 정식 공개를 앞두고 있다. 내년 초부터 글로벌 시장에 순차적으로 출시된 이후 하반기 한국 시장에서도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
정진수 기자 brje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