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바그너 메르세데스벤츠 디자인총괄 부사장과 비전 원-일레븐 콘셉트
메르세데스벤츠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디자인에 진심이다. 브랜드 핵심 성공 요인으로 디자인을 꼽기도 한다. 새로운 세대 소비자를 중심으로 외적인 디자인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디자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기도 하다. 수 년 전부터 벤츠는 ‘감각적 순수미’라는 디자인 철학을 설정하고 일관성 있는 디자인을 선보여 왔다. 전통과 현대적인 감각을 조화시킨 디자인이라고 강조한다. 처음에는 파격적인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특히 3세대 CLS 실물을 처음 봤을 때 후면 디자인은 적응이 쉽지 않았다. 이후 나온 신차들이 3세대 CLS로부터 시작된 디자인을 물려받으면서 발전시켰다. 상어를 연상시키는 샤크노즈 전면 디자인과 얇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후면 실루엣이 특징이다. 벤츠의 새로운 디자인 방향성은 시장에 적중했다. CLS는 시작가격이 1억 원대인 고가 모델이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018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6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꾸준한 판매량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 도로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CLS와 패밀리룩을 이루는 후속 신차들도 합류하면서 새로운 디자인은 벤츠를 상징하는 디자인으로 자리매김 했다. 국내 수입차 1위 브랜드로 많이 팔린 만큼 사람들의 눈에도 익숙해졌다. 벤츠의 ‘감각적 순수미’ 디자인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느낌이다.
메르세데스벤츠 C111과 비전 원-일레븐, 야사(YASA)가 개발한 소형 고성능 전기모터
예상하지 못했던 디자인이 탄생해 사람들의 일상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어느 분야에서든 흥미롭다. 부동산 다음 가는 고가 자산인 자동차가 유행처럼 팔리는 상황은 더욱 그렇다. 소비자들은 고가인 자동차를 구매할 때 디자인만 보고 사지 않는다. 성능과 기능 등 전반적인 상품성을 요목조목 따져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벤츠는 소비자들의 이러한 구매 과정 속에서 디자인뿐 아니라 상품성까지 만족시켜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택받은 셈이다.메르세데스벤츠 캘리포니아 칼즈배드 디자인센터
○ 우리가 잘 몰랐던 벤츠 디자인의 비결 ‘디자인 에센셜’
비결은 ‘디자인 에센셜(Design Essential)’이라는 벤츠 행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올해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렸다. 우리가 잘 몰랐지만 벤츠는 지난 2017년부터 디자인 특화 행사인 디자인 에센셜을 매년 개최해왔다. 생각해보면 벤츠가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도 이 무렵이다. 디자인 에센셜은 브랜드 디자인 철학과 발전 방향성을 보다 자세하게 공유하기 위해 기획한 플랫폼이라고 한다. 업계 관계자와 미디어 등을 세계 각지에 있는 벤츠 디자인센터나 거점에 초청해 워크숍 행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미래 디자인 방향성, 콘셉트카, 디자인 영감의 원천, 관련 아이디어 등이 디자인 에센셜 행사에서 소개된다.
메르세데스벤츠 C111(원-일레븐)
첫 디자인 에센셜은 2017년 독일 진델핑겔디자인센터에서 열렸다. 소형 세단 모델에 대한 디자인 비전을 제시하고 보다 발전된 디자인 철학을 공유했다. 2018년에도 독일 진델핑겔디자인센터에서 디자인 에센셜을 개최했다. 2019년부터 디자인 에센셜은 독일을 벗어나 해외를 무대로 삼았다. 프랑스 니스디자인센터에서 디자인 에센셜이 진행됐다. 브랜드 첫 전기 세단 ‘EQS’ 디자인 방향성을 담은 ‘비전 EQS’를 선보이고 전동화와 함께 진일보한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나는 벤츠의 미래 방향성을 공개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영향으로 2020년과 2021년에는 디자인 에센셜을 진행하지 않았다. 네 번째 디자인 에센셜은 2022년 프랑스 니스디자인센터에서 개최했다. ‘비전 AMG’와 ‘비전 EQXX’를 통해 고성능 장거리 럭셔리 전기차를 정의했다. 그동안 개최된 디자인 에센셜을 통해 럭셔리를 넘어선 럭셔리 브랜드 도약을 꾀하는 벤츠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와 활발한 협업으로 고루한 럭셔리 이미지를 경계하면서 ‘영앤리치(젊은 부자)’ 감성을 자극하는 모습이다.
크리스토프 스타진스키 메르세데스벤츠 전기차 아키텍처·E-드라이브 개발총괄 부사장
○ “초고가·호화 한정판 모델 강화”… 벤츠, ‘다이아몬드 럭셔리 전략’ 발표
다섯 번째 디자인 에센셜은 처음으로 유럽 외 국가에서 열렸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벤츠 칼즈배드(Carlsbad) 디자인센터를 무대로 삼았다. 이번 디자인 에센셜에서 벤츠는 보다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변화할 럭셔리 브랜드 방향성을 제시했다. 행사 이름을 ‘디자인 넘버5(No.5)’로 정하고 메인무대를 오렌지 컬러로 꾸몄다.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 샤넬과 에르메스를 연상시킨다. 주제는 ‘아이코닉 럭셔리의 탄생’으로 설정했다. 스타 디자이너 ‘고든 바그너(Gorden Wagener)’ 디자인총괄 부사장과 ‘크리스토프 스타진스키(Christoph Starzynski)’ 전기차 아키텍처·E-드라이브 개발총괄 부사장이 이번 디자인 에센셜 참석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를 찾았다. 고든 바그너 부사장은 벤츠가 가진 아이콘 요소를 설명하고 크리스토프 스타진스키 부사장은 새로운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날 벤츠의 차세대 라인업과 기술 방향성을 소개했다.
특히 스타진스키 부사장은 이번 디자인 에센셜에서 벤츠의 차세대 라인업 전략으로 ‘다이아몬드 라인업’ 개념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벤츠 다이아몬드 라인업 전략은 톱엔드(TOP-END) 럭셔리와 코어(CORE) 럭셔리, 엔트리 세그먼트 등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평평한 상단(톱엔드 럭셔리)과 볼록한 가운데(코어 럭셔리), 끝이 뾰족(엔트리 세그먼트)하게 좁아지는 흔한 다이아몬드 디자인을 제시했다. 엔트리 세그먼트 모델 수를 줄이고 코어 럭셔리 모델을 주력으로 전개하면서 최상위 톱엔드 럭셔리 차종을 늘리겠다는 개념이다. 최상위 톱엔드 럭셔리 차종은 다시 맞춤 사양이 적용되는 개인화(Individualization) 모델과 수집용(Collectible), 단 한 명을 위한 원오프(One-offs) 모델 등 3종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양산 모델 수를 줄이면서 고가 한정판 모델을 늘린다는 의도다. 판매량보다 수익에 초점을 둔 전략으로 고가 럭셔리 브랜드 특유의 희소성까지 확보하는 방향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수집용과 원오프 모델 강화는 부가티나 파가니 등 하이엔드 슈퍼카 브랜드가 전개하는 전략이다. 그동안 대중을 중심으로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켜 온 벤츠가 럭셔리를 넘어선 럭셔리 브랜드로 변신을 시도하는 셈이다. 스타진스키 부사장 발표에 앞서 바그너 부사장이 명품 브랜드 샤넬과 에르메스 등을 언급하면서 벤츠의 럭셔리 요소를 강조한 이유다. 실제로 벤츠는 한정 수량 생산하는 수집용 스포츠카를 실제로 제작 중이다. 이미 외관 디자인이 완성 단계다.
이번 디자인 에센셜에서 월드프리미어로 선보인 콘셉트카 ‘비전 원-일레븐(VISION ONE-ELEVEN)’은 벤츠의 최신 전동화 기술과 디자인이 집약된 모델로 새로운 럭셔리 전략의 시작을 알리는 모델이다. 다이아몬드 라인업 전략의 톱엔드 럭셔리 모델과 원오프 모델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난 1969년 9월 공개된 오렌지 컬러 걸윙도어(문짝이 위로 열리는 방식) 스포츠카 ‘C111(원-일레븐)’을 오마주한 콘셉트다. C111이 1960년대 벤츠 브랜드 디자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것처럼 비전 원-일레븐은 벤츠의 차세대 럭셔리 방향성을 제시한다. 비전 원-일레븐은 지금까지 선보인 벤츠 모델과는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다.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를 넘어 부가티급 슈퍼카 모델을 겨냥하는 모습이다. 낮고 넓은 실루엣과 호사스러운 실내, 날개처럼 열리는 커다란 걸윙도어가 특징이다.
○ NFT부터 AI·고성능 전기모터까지… 최신 기술 트렌드 디자인 관점 접근
이번에 처음 경험한 벤츠 디자인 에센셜은 브랜드가 전개하는 디자인 행사 그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디자인과 콘셉트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는 최신 기술에 대해서도 심도 깊게 다뤘다. 5~6개 세션을 운영해 조별로 행사 참가자들이 각 세션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올해는 개인 맞춤 주문 프로그램인 ‘마누팍투어(MANUFACTUR)’ 세션과 메르세데스-마이바흐 나이트 시리즈, 신형 E클래스 전시를 비롯해 새로운 아이코닉 외장 램프 디자인과 최신 차량용 인공지능(AI) 기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 제로레이어 기반 확장현실, 블록체인 디지털 아티스트 ‘하름 판 덴 도르펠(Harm van den Dorpel)’과 협업한 전용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토큰) 공개 세션, 야사 전기모터 소개 세션 등을 운영했다. 또한 디자인 에센셜 행사를 통해 AI 챗GPT 기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레벨3 자율주행시스템 상용화 소식도 밝혔다. 레벨3 자율주행시스템은 벤츠가 세계 최초로 선보이고 독일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올해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주에서 기술 승인을 획득했으며 내년 완전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야사 고성능 전기모터 발표 세션
세션을 통해 공개한 AI 기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나 ‘야사(YASA)’ 전기모터 등은 실제로 콘셉트카인 비전 원-일레븐에 채용된 기술이다. 특히 지난 2021년 인수한 고성능 전기모터업체 야사가 디자인 에센셜 행사를 통해 전면에 나섰다. 기존 EQ시리즈에 탑재된 전기모터보다 크기와 무게를 3분의 1수준으로 줄인 ‘액시얼플럭스(axial flux)’ 전기모터를 공개했다. 동급 최고 수준 효율과 출력 밀도를 갖춘 고성능 소형 전기모터다. 1개 모터가 최대 500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기존 전기모터와 동일한 공간에 3개 모터를 탑재할 수 있어 최고출력 1500마력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야사 관계자는 발표했다. 이번에 공개한 비전 원-일레븐을 비롯해 향후 메르세데스-AMG 전기차 전용 플랫폼에 탑재될 예정이라고 한다.메르세데스벤츠가 디지털 아티스트 하름 판 덴 도르펠과 협업해 만든 NFT 작품
블록체인 기반 NFT 작품이 벤츠 디스플레이에 적용된 모습
현장에서 직접 NFT 작품을 생성하는 모습
벤츠는 NFT분야에서도 새로운 디지털 비즈니스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에 디지털 아티스트 하름 판 덴 도르펠과 협업해 블록체인 기반 예술작품인 ‘마신(Maschine) 컬렉션’을 선보인 것. 자동차 바퀴와 림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은 코드 생성 NFT로 만들어졌으며 신형 E클래스를 시작으로 향후 차량 내 디지털 영역에서 구매한 NFT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500여종으로 구성된 NFT 작품은 모두 완판(완전판매)됐다고 한다. 전시된 E클래스에 탑승해 NFT 작품이 센터디스플레이에서 구동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벤츠 관계자는 “벤츠는 옴니콤과 파트너십을 맺고 ‘메르세데스벤츠NXT’라는 이름으로 NFT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며 “NFT 프로젝트를 전용 채널을 통해 판매할 계획으로 구매자는 새로운 인카앱(in-car app)을 통해 디지털 작품을 차량에 탑재해 개인 소장 예술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이처럼 벤츠 디자인 에센셜은 AI부터 최신 전기모터와 블록체인까지 테크(기술) 전시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최신 기술 트렌드를 집약한 행사로 운영됐다. 기술과 디자인은 함께 가야한다고 강조한 스타진스키 부사장의 말처럼 디자인과 기술이 함께 융합된 전시회로 행사의 가치를 극대화했다. 업계 종사자나 자동차 디자이너, 엔지니어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도 유익한 프로그램으로 보인다.
엔데믹(풍토병화)에 맞춰 벤츠 고유 연례 디자인 이벤트인 디자인 에센셜이 유럽을 넘어 전 세계 거점에서 열리는 추세다. 한국 역시 디자인 에센셜 개최에 최적화된 시장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벤츠가 이번 디자인 에센셜에서 제시한 다이아몬드 럭셔리 라인업 전략은 실제 한국 시장 판매 추이와 여러모로 닮았다. 한국 시장에서는 엔트리 모델인 A클래스나 GLA보다 E클래스와 CLS, S클래스, GLC, GLE 등이 더 많이 팔린다. 오프로더 G바겐은 판매물량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는다. 전반적으로 다른 독일 브랜드에 비해 할인폭도 적다. 엔트리 모델을 줄이고 고급 모델을 확대하는 벤츠의 다이아몬드 럭셔리 전략과 일맥상통하는 양상이다. 언젠가 벤츠 디자인 에센셜이 한국에서 개최되기를 기대해본다.
동아닷컴 김민범 기자 mbkim@donga.com